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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hrayeogu

[(...)7월 29일 아산만 전투와 청군의 분산. 7월 25일부터 30일 사이에 조선은 청국과 자국 사이의 관례(Conventions) 포기 선언을 통보했다. 조선은 이렇게 포기를 선언함으로써 그 관례를 통해 청나라가 행사하던 모든 종주권을 거부한 것이다. 그 결과 조선에서 청국 깃발(Dragon flag)은 내려졌다. 8월 1일, 조선 국왕은 조선 정부의 개혁을 시작하겠다고 공포했다. 일본의 청국에 대한 선전포고 및 청국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 8월 4일 청국 군대가 평양을 점령하고 요새화했다. 대규모로 증강된 일본군이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1개 사단이 원산에 주둔했고, 나머지는 평양을 향해 서쪽으로 진격했다. 8월 28일, 일본과 조선이 대청 동맹(alliance against China)을 결성했다. 9월 15일 평양에서 대규모 전투가 발발했다. 청군 23,000여 명은 평양을 견고히 지키고 있었다. 일본군 17,500여 명은 평양을 사면에서 공격했고, 다수의 병사를 잃은 청군을 격퇴하였다. 청군은 공포에 휩싸인 채 야음을 틈타 달아났다. 9월 16일, 승리를 거둔 일본군 여러 부대가 평양에 입성하였다. 청군 측 사상자는 2,000여 명이었고, 그들 중 513명은 포로로 잡혔다. 일본 측 사상자는 516명이었다. 평양이 함락되고 청군이 북쪽으로 달아나 압록강을 넘어가자 조선에서 발발한 청국 육군과 일본 육군 사이의 전쟁은 종료되었다. 9월 17일, 이토(Ito) 해군 중장이 지휘하는 배 12척으로 구성된 일본군 함대와 정여창(Ting) 제독이 이끄는 배 14척과 수뢰정 6척으로 구성된 북양함대가 압록강 어귀에서 대규모 해전에 돌입했다. 전투는 대략 4시간 30분 동안 지속되었다. 청국은 정원호(King-yuen), 진원호(Chin-yuen), 양위호(Yang-wei), 초용호(Chon-yung) 등 4척을 잃었다. 1894년 12월 1일자 재팬 메일(Japan Mail) 부록(Supplement)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일본 측 사상자는 사망 78명 부상 160명이다. 반면 청군 측 사상자는 사망 700명, 부상 252명이다. 전황에서 서울로 관심을 돌리면, 조선 국왕이 약속한 개혁은 17명으로 구성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High Commission)에게 맡겨졌다. 군국기무처의 심의가 완료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결과는 충분히 실현되지 않았다. 군국기무처의 최초의 가시적인 결과는 전통적인 긴 소매의 신속한 폐지, 서양식 제복을 입은 조선인 경찰의 출현이다. 조선인 경찰이 겸연쩍은 듯한 태도를 취했다면, 그것은 그 경찰이 새로운 직위만큼이나 제복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His apologetic ai may -> His apologetical may) 은전(銀錢)과 동전(銅錢) 등 새로운 동전도 유통되었다. 이 동전은 구리화폐(copper cash)에 비해 크게 발전한 것이고, 이미 한성에서 일반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가장 큰 “개혁”은 관아에서 일어나고 있다. 관아에서 개혁은 빠르고, 훌륭하고, 가차 없이 진행되고 있다. 17,000명 이상의 남녀들이 급여대상자 명단에서 제명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 숫자는 환관, 궁녀, 각 관아의 아전들, 문지기, 가마꾼, 봉수군 등 궁궐에 드나드는 이들을 포함한다. 10월 20일, 이노우에(Inouye) 백작이 한성에 도착했고, 오토리( 공사의 후임 공사가 되었다. 가을 내내 동학교도들의 약탈과 무법상태가 남부지방 전역에서 상당히 일반적인 일이 되었고, 동학교도들은 북쪽으로 황해도와 강원도까지 세력을 뻗쳐나갔다. 지방 관찰사들은 공격을 받고, 관아가 불탔으며, 약탈을 당했다. 한동안 동학교도들은 자신들 앞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피해지역에는 조선 군대가 파병되었다. 하지만 동학교도들은 마음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였다. 대원군이 실권한 뒤 12월에 조선 정부는 일본군 장교 지휘 하의 몇몇 일본군 중대의 지원을 받아 좀 더 단호하게 이 무법자들을 진압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충청도 지방에서 수많은 전투가 발발했고, 이 글을 쓰는 도중(1895년 1월 1일) 동학교도들의 세력은 붕괴했고, 다시 법이 효력을 발생했다. 그러므로 법의 효력이 인정될 것이다.(....)]_출전 · 『The Korean Repository』 January 1895, A Retrospect-1894 코리안 리포지토리, 동학당 봉기와 청일전쟁을 겪은 1894년의 조선 정세를 정리함 사료 고종시대사 > 사료 고종시대사 18 > 고종 31년 > 1894년(고종 31년) 12월 > 1894년(고종 31년) 12월 (일자 미상) > 코리안 리포지토리, 동학당 봉기와 청일전쟁을 겪은 1894년의 조선 정세를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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